지노 프란체스카티 Zino Francesca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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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정보

  • 주요역할 연주 (Violin)
  • 국가 France
  • 성별 남자
  • 출생/결성 1902-08-09 Marseille, France
  • 사망/해체 1991-09-17 La Ciotat, France
  • 활동시기 20th Century

바이오그라피

1902년 8월 9일 프랑스의 마르세이유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음악가였는데, 아버지는 파가니니의 유일한 제자인 시보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어린 프란체스카티는 이러한 아버지로부터 처음으로 바이올린 레슨을 받으며 파가니니의 위대한 현악 전통을 체득할 수 있었다. 지노의 어머니 또한 상당한 실력을 갖고 있던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그의 아버지와는 콘서바토리에서 수학할 당시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된 것이다.

부모의 교육과 영향 덕분인지 지노는 어릴 때부터 탁월한 실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는데, 이미 10세에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지노에게 실력을 계발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결코 자신의 아들이 프로페셔널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직업 연주자란 경제적으로 안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탈리아계 선조들이 전통적으로 그러했던 것처럼 지노가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다.

 

1차 세계대전 동안 프란체스카티는 1주일에 6일은 법률 학교에 다녔고 일요일에는 마르세이유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병사들을 위해 바이올린 연주를 했다. 후일 이러한 비공식적인 연주회들은 그로 하여금 프랑스를 대표하는 많은 최고의 음악가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그들과 동질감을 형성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지노는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로는 법률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그의 가족에게는 돈이 필요했고, 결국 지노의 재능이 돈을 벌 수 있는 자산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가족의 위기는 곧 하나의 직업에 대한 ‘겹세로줄’이 된 동시에 새로운 직업에 대한 ‘아첼레란도’로 이어졌다. 1924년 프란체스카티는 파리로 건너가 모리스 라벨을 만났다. 촉망받던 이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는 위대한 프랑스의 작곡가와 피아노 듀오를 결성했고, 함께 런던으로 건너가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이러한 라벨의 후원과 자신의 탁월한 재능에 힘입어 1927년에는 에콜 노말 드 무지끄에서 교수직을 맡을 수 있었다.

지노 프란체스카티는 20세기 현악 연주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사랑받은 바이올리니스트 가운데 한 명으로서, 그는 프랑스 악파의 현악 전통을 대표하는 아이콘과 같은 존재였다. 프랑스 레퍼토리에 있어서 그의 저 감각적인 음색과 비브라토, 날렵한 테크닉이 주는 강렬한 인상은 감히 비견할 상대가 없었을 정도다. 프랑스에 국한하지 않았던 그의 레파토리는 대단히 넓어서 바로크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소품들과 소나타, 협주곡을 아울렀는데 미요, 레스피기, 시마노프스키, 프로코피에프와 같은 당시의 최신작들까지 섭렵했다. 평론가들은 입을 모아 그를 최고의 비르투오소로 손꼽는 동시에 가장 순수한 의미에 있어서의 고전주의자임을 역설했다. 실제로 그는 바흐와 베토벤, 모차르트에 있어서 가장 충실한 해석가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브루노 발터와 함께 녹음한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브람스의 [2중 협주곡] 레코딩에서는 다른 작품에서와는 달리 무겁고 신중한 톤과 스타일을 구사하며 음악에 고급스러움과 우아한 힘을 실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레너드 번스타인과 함께 녹음한 시벨리우스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는 자신의 표정보다 지휘자와의 호흡을 중요시하며 음악의 큰 틀을 주시하는 거시적인 모습 또한 찾아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그는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을 녹음하지는 않았지만 몇몇 단편 녹음들과 더불어 바이올린 협주곡(콜럼비아 시대의 모노 녹음과 70년대 DG에서의 스테레오 녹음)을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음악의 형식적인 안정감과 음 자체의 밀도에 집중했는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빠르고 평탄하게 진동하는 비브라토는 그의 인토네이션과 톤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음향을 만들어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음악성을 결정짓는 요소로는 상상력 풍부한 음색과 뉘앙스일텐데, 이는 프랑코-벨지움 악파의 전형적인 스타일일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계 특유의 투명한 색채가 가미된 그만의 독특한 개성이다. 그러한 탓에 명인기적인 테크닉과 빛나는 음색, 풍부한 인간미와 섬세한 유머가 함께 녹아있는 그의 최고의 레파토리는 단연 파가니니와 생상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모노럴로 녹음한 이 두 작곡가의 [1번 협주곡]과 [3번 협주곡]은 지금까지도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프란체스카티의 대표 명반으로 손꼽힌다.

 

아우어 악파 출신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보여준 그 ‘러시아적’인 완벽함에 비견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경쟁대상으로 프란체스카티의 ‘지중해적’인 스타일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프란체스카티는 자신의 1727년산 HAT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대신 파가니니가 사용하던 과르네리 바이올린을 직접 연주했을 때 저항할 수 없는 친연성을 느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물론 레코딩에서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을 사용할 수 없었지만, 그는 항상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을 항상 파가니니의 저 위대한 전설에서 찾고자 했다. 그리하여 196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 그의 콜럼비아 레코딩들은 한결 같이 프란체스카티의 정체성과 직결되어 있는 연주로 인식되며 오랜 동안 바이올린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불후의 명반으로 일컬어져 오고 있다. 특히 취리히 쳄버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한 비탈리의 [샤콘느] 녹음은 찬연한 슬픔이 배어있는 최고의 명연으로 살을 에는 듯한 비장함으로 무장한 하이페츠의 녹음과 함께 이 작품 해석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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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10세 때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로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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