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주 첼리비다케 Sergiu Celibidache

대표이미지

아티스트 사진

기타 이미지들

  • 아티스트 이미지들
  • 아티스트 이미지들

아티스트 정보

  • 주요역할 지휘
  • 국가 Romania
  • 성별 남자
  • 출생/결성 1912-06-28 Roman, Romania
  • 사망/해체 1996-08-14 Paris, France
  • 활동시기 20th Century

바이오그라피

  첼리비다케는 1912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루미나이의 수도 부쿠레슈티에 있는 부쿠레슈티 대학에서 철학과 수학을 배웠다. 아버지는 아들을 루마니아에서 정치가로 키우려 했지만 첼리비다케는 1936년에 독일로 떠나 베를린 대학에서 전공을 이어나가면서 배를린 예술대학에서는 음악을 배웠다. 이 시기 마르틴 슈타인케Martin Steinke의 불교 이념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예술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선불교적인 요소가 이때부터 잉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첼리비다케의 인생에서 가장 뼈아픈 기억은 바로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일이다. 1945년 푸르트벵글러가 친 나치당 활동때문에 지휘를 할 수 없게 된 후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1946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로 추대된 첼리비다케는 패전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던 악단과 ‘동고동락’하며 자신을 헌신했다. 1947년에는 푸르트벵글러가 무죄 판결을 받아 베를린 필하모닉에 복귀했고 이변이 없는 한 푸르트벵글러 사후 그는 충분히 상임지휘자가 될 위치에 있었다.

  1954년 푸르트벵글러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단원들은 첼리비다케 대신 음악 비즈니스에 밝았던 카라얀을 선택했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 카라얀에게 베를린 필하모닉의 절대권력을 줬고 깐깐하고 융통성 적은 첼리비다케는 악단에 대한 철저한 배신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첼리비다케는 1992년 베를린 필하모닉과 콘서트를 가지기 전까지 무려 38년간 동악단의 포디움에 서지 않았다. 그의 베를린 필하모닉 복귀 콘서트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버린 공연의 레퍼토리는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이었다.

  그 후 첼리비다케는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 로열 덴마크 오케스트라, 뮌헨 필하모닉을 거치면서 그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냈다. ‘황소걸음’의 느린 템포로 대변되는 첼리비다케의 전형적 모습은 주로 1979년부터 맡았던 뮌헨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로서의 면모이다.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 영상물(Arthaus)에서 보이듯이 댄스를 방불케 하는 역동적인 지휘 자세를 구사했던 그는 지휘봉의 젓는 속도를 점차 느리게 설정하여 무아의 최면상태를 이끌었다. 첼리비다케는 엄청난 액수의 연봉을 요구하여 뮌헨 음악계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지만 뮌헨은 절대 그를 떠나보낼 수 없었다. 만년에는 주로 낮아서 지휘했는데 몸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1996년 죽기 전 몇 달을 제외하고는 손에서 지휘봉을 절대 놓지 않았다.

관련 사이트


주요 아티스트로 참여한 앨범 (24)


앨범 모두 보기   연주별 상세 모두보기

관련 사건 / 이벤트 (2)

날짜 / 기간 요약 / 상세내용
1945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에 선출됨 푸르트벵글러가 나치 부역 혐의로 지휘 활동을 중단하고, 임시 상임이었던 레오 보르하르트(Leo Borchard)가 불의의 사고로 별세한 후 수일만에 첼리비다케가 상임으로 선출되어 1952년까지 재직했다.
1979 뮌헨 필 음악감독 취임 루돌프 켐페의 죽음(1976) 이후 공석 중이던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Münchner Philharmoniker)의 음악감독에 취임하여 1996년 사망 시까지 재직했다.

관련 아티스트 (5)


이 아티스트에 대한 생각 (0)

댓글을 갖고 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