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릴 콘드라신 Kirill Kondra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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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가족이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었던 관계로 키릴은 어릴 때부터 니콜라이 지랴예프에게 피아노와 이론을 배웠다. 1931년 이미 어린이극장의 지휘자로서 캐리어를 쌓기 시작했는데, 1932년에 모스크바 음악원의 지휘과에 입학하여 보리스 하이킨의 가르침을 받았다. 
재학중에 네미로비치 - 단첸코 극장의 부지휘자가 되었고, 1934년 10월 25일 브랑케트의 <코르누비유의 종>을 통해 화려하게 데뷔하였다. 1936년 음악원 졸업과 동시에 레닌그라드의 마루이 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하였는데, 1943년까지 역임했다. 모스크바에 되돌아와 볼쇼인 극장의 스태프 지휘자가 되었고, 사무엘 사모수드와 니콜라이 골로바노프를 보좌하였다. 
1956년 볼쇼이 극장을 떠나 콘드라신은 콘서트 지휘자로 전신하였다. 특히 1958년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에서 본선의 지휘자를 하였는데, 젊은 미국인 피아니스트 밴 클라이번이 우승했을 때 그 개선 연주회를 위해 미국에 초청되어 서방측에서도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1960년 모스크바 필하모니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였고, 1975년에 퇴임할 때까지 이 오케스트라를 세계적 수준으로까지 육성시켰다. 
단신으로도 런던, 파리, 베를린 등에 객원으로 초청되었고, 소련에서도 가장 인기 높은 지휘자로서 활약했는데 1979년에 갑자기 네덜란드에 망명하여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취임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영국 데카와 필립스와 같은 서방측 레코드 회사와 연계되어 빈 필하모니,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등 일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이렇듯 화려한 활약을 시작하려던 바로 그때 1981년 3월 7일 암스테르담에서 심장 발작으로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콘드라신은 소련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는 말러의 스페셜리스트로서 평가가 높았으며,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도 정평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제4번과 제14번 <죽은 자의 노래>의 초연을 담당하여 훌륭한 성과를 올렸던 일은 기억이 새롭다. 콘드라신은 모스크바 악파의 지휘자답게 전체적으로 중후하고 로맨틱한 맛이 짙은 표현에 그 특색이 있다. 레코드에서도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전집(멜로디아)에서 그러한 그의 예풍을 단적으로 알 수가 있다. 또한 근대적인 구성력에도 뛰어나며, 그러한 밸런스의 우수성이 서방측에서 높이 평가받게 된 요인이 되었다. 
망명 후의 레코드는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가 대표적인 음반으로서 들 수 있는데, 그중에서 특히 [세헤라차데]는 스케일이 큰 명연이라 하겠다. 화려한 색채감과 여유가 있는 다이내미즘이 특징적이다. 콘드라신은 거장의 예술 영역에 발을 내딛기 시작한 시점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참으로 애석하기 짝이 없다.
(세계 명지휘자 사전, 삼호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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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기간 요약 / 상세내용
1961-12-30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4번을 초연 1936년에 이미 완성되었으나 당국의 제재로 초연되지 못했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4번이 스탈린 사후인 1961년에야 콘드라신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1962-12-18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을 초연 므라빈스키가 초연을 거절한 교향곡 13번을 콘드라신이 모스크바에서 초연했다.
1978 서방으로 망명 네덜란드 투어 중 정치적 망명을 단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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