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노 발터 Bruno Wal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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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 발터는 브루노 슐레징어라는 본명으로 1876년 9월 15일 베를린의 알렉산더플라츠에서 태어났다. 유대인 중류 계층이었던 8세때부터 베를린 슈테른 음악원에서 공부하고 9세 때 피아니스트로서 첫 공개 연주회를 가졌다. 피아니스트를 지망하던 발터는 진로를 변경하게 된다. 1889년 한스 폰 뷜로가 지휘하는 콘서트를 접하고 나서 또 1891년 바이로이트에서의 연주를 보고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발터는 1893년 쾰른 슈타츠오퍼의 견습 지휘자가 되어 지휘를 익혔다. 이듬해 쾰른 오페라에서 알버트 로르칭의 오페라 [칼 대장장이 Der Waffenschmied)로 데뷔한 발터는 이 해부터 1896년까지 함부르크 시립 오페라의 합창지휘자로 일했다. 여기서 발터는 구스타프 말러와 처음으로 조우했다. 발터는 말러를 우상으로 여겼고, 나중에 말러 음악 해석의 권위자가 되었다.

 

1896년부터 브레슬라우 오페라에서 지휘자가 되었는데, 말러가 발터를 위해 마련해준 일자리였다. 발터가 본명인 브루노 슐레징어 대신 브루노 발터로 예명을 삼은 것은 이 무렵이다. 극장의 행정감독인 테오도르 뢰베가 ‘실레지아(대부분이 폴란드, 일부가 체코인 지역) 사람’ 이라는 특정 지명의 뜻을 가진 ‘슐레징어’ 보다는 다른 이름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일부러 유대인답지 않은 이름으로 개명한 것이란 견해도 있다. 혹자는 발터의 본명이 브루노 발터 슐레징어였고, 나중에 미들네임을 성으로 썼다는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미들네임이 없었으며, 브루노 슐레징어에서 브루노 발터로 개명할 때까지 한 번도 ‘발터’란 이름을 쓴 적이 없었다 한다.

 

1897년 프레스부르크에서, 그리고 1898년 라트비아 리가에서 오페라를 지휘한 발터는 1900년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는 베를린 운터 덴 린덴 슈타츠오퍼에서 프란츠 샬크의 후임으로 프러시아 왕립 지휘자가 되었다. 거기서 활동하던 동료 중에는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지휘자 카를 무크가 있었다. 베를린에서 발터는 한스 피츠너의 [불쌍한 하인리히 Der arme Heinrich]를 지휘했다. 피츠너와 발터는 평생지기 친구가 되었다. 1901년 발터는 어시스트가 되어 달라는 말러의 초청을 받아들여 빈 궁정오페라로 향했다. 발터는 베르디 [아이다]로 이곳에서 지휘 데뷔했다. 1902년 발터의 명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져 프라하와 런던, 로마 등 전 유럽에 걸쳐 지휘자로 초청받았다. 1910년 발터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스미스의 [약탈자들]을 코벤트 가든에서 지휘했다. 1911년, 말러의 사망 후 얼마 뒤 발터는 뮌헨에서 [대지의 노래] 초연을 이끌었다. 이듬해에는 말러 [교향곡 9번]을 빈에서 지휘했다.

 

1911년 발터는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획득했지만 빈을 떠나 뮌헨에 도착, 1913년 왕립 바이에른 오페라와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1914년 1월 그는 모스크바에서 처음으로 지휘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발터는 지휘 활동을 계속하며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의 [비올란타], [폴리크라테스의 반지], 피츠너의 [팔레스트리나] 등 동시대 작품들을 초연했다. 1920년 발터는 발터 브라운펠스의 오페라 [새]의 초연을 이끌었다. 뮌헨에서 발터는 유제니오 파첼리 추기경과 교류하며 가깝게 지냈다. 추기경은 훗날 교황 피우스 12세로 즉위했다. 1922년 뮌헨에서의 임기를 마친 발터는 1923년 뉴욕으로 떠났다. 카네기 홀에서 뉴욕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던 그는 디트로이트, 미네소타, 보스턴 등 미국 각지에서 지휘 활동을 했다. 다시 유럽으로 돌아온 발터는 1925~1929년까지 베를린 시립오페라, 샤를로텐부르크, 라이프치히 등 독일 각지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1926년에는 라 스칼라에서 데뷔했고, 1924~1931년까지 런던에서 발터는 코벤트 가든의 독일 주간 지휘를 담당했다.

1920년대 말 나치의 리더 아돌프 히틀러는 베를린 오페라에 유대인 지휘자가 존재하는 것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리고 발터를 언급할 때 일부러 “브루노 발터, 일명 슐레징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33년 권력을 잡은 나치는 예술계에서 유대인의 활동을 금지하는 체계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이에 오스트리아로 피신한 발터는 이후 몇 년 동안 그곳에 기반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면서도 1934~1939년 암스테르담에서 자주 객원지휘를 하고 1932~1936년 뉴욕에서도 해마다 콘서트를 가졌다.

 

합병 오스트리아(안슐루스) 시절인 1938년, 발터가 파리에서 레코딩 세션을 가질 때 프랑스는 발터에게 시민권을 발급해 주겠다고 제의했고, 발터는 이를 받아들였다. 발터의 딸은 당시 빈에 있었는데 나치에게 체포됐었다. 그러나 발터는 자신의 영향력으로 딸을 석방시킬 수 있었다. 2차세계대전 기간 동안 스칸디나비아에 살던 그의 형제와 남매에게도 안전한 거처를 마련할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발터는 발휘할 수가 있었다. 1939년 11월 1일 발터가 탄 배는 미국으로 향했다. 이후 미국은 남은 평생 발터의 거처가 된다. 캘리포니아 비벌리 힐스에 자리를 잡은 발터는 작가 토마스 만을 비롯한 수많은 망명자 이웃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발터는 음악 자체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철학자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人智學)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인지학이란 정신과 육체의 2분법을 넘어, 정신, 육체, 영혼의 세 관점으로 인간을 파악하는 철학이다. “인지학을 다시 배우면서 나의 모든 존재가 강해지는 것을 느꼈고 음악성과 심지어 지휘도 새롭게 변하는 것 같았다”고 발터는 술회했다.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발터는 시카고 심포니, LA 필, NBC 심포니, 뉴욕 필하모닉(1947년부터 1949년까지 예술 고문으로 재임했지만 음악감독 제의는 거절했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 수많은 미국의 오케스트라들과 작업했다. 1946년부터 발터는 에든버러,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비롯해 빈과 뮌헨 등 유럽에 여러 차례 연주여행을 떠났다.발터의 최만년은 콜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스튜디오 레코딩으로 대표된다. 발터 최후의 실황 무대는 1960년 12월 4일 반 클라이번이 협연한 LA 필하모닉과의 공연이었다. 그의 최후의 레코딩은 1961년 3월 말 콜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모차르트 서곡집 녹음이었다. 유대인 환경에서 자랐지만, 만년의 발터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발터는 1962년 비벌리 힐스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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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기간 요약 / 상세내용
1885 피아니스트로서 첫 공개연주회를 가짐
1894 지휘자 데뷔 쾰른 오페라에서 로르칭의 <칼 대장장이 Der Waffenschmied>로 지휘자 데뷔했다.
1911-11-20 말러의 <대지의 노래> 초연 말러가 별세한지 6개월 후, 그의 유작 <대지의 노래>를 뮌헨에서 초연했다. 이듬해에는 교향곡 9번도 초연했다.
1939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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