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말러 Gustav Mah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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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말러는 보헤미아 지방 칼리슈트의 유대인 가족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곧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모라비아의 이글라우로 이주했고, 말러는 거기에서 그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들이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안 부모는 그가 여섯 살 때에 피아노 레슨을 받게 했다. 1875년에 열다섯 살의 말러는 빈 음악원에 입학하여 율리우스 엡슈타인에게서 피아노를, 로베르트 푹스에게서 화성학을, 프란츠 크렌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3년 뒤에 말러는 빈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안톤 브루크너가 거기에서 강의하고 있었다. 말러는 거기에서 음악과 역사, 철학을 공부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는 음악 선생으로서 일하면서 그의 첫 주요한 작곡 시도로서 칸타타 〈탄식의 노래〉를 지었다. 이 곡은 경연에 참가하였으나 입상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1880년대, 말러는 지휘자로서의 그의 생애를 바트 할(Bad Hall)의 여름 극장에서 시작했다. 그 다음 해부터 그는 차례로 큰 오페라 하우스의 지휘자 자리를 가졌다. 1881년에는 류블랴나, 1882년에는 올로뮈츠, 1883년에는 빈, 1884년에는 카셀, 1885년에는 프라하, 1886년에는 라이프치히, 1888년에는 부다페스트로 갔다. 1887년에, 그는 아픈 아르투르 니키쉬를 대신해 바그너 의 《니벨룽의 반지》를 연주하며 평론가와 대중 사이에서 명성을 확고히 했다. 그 다음 해에, 그는 칼 마리아 폰 베버의 미완성 오페라 〈세 사람의 핀토〉의 완성된 연주용 판을 말들었으며, 그것의 성공으로 경제적인 보상을 받았고 또한 서서히 그의 명성이 높아지는 데에 기여했다. 그의 첫 장기 계약은 1891년의 함부르크 오페라에서였으며 거기서 1897년까지 머물렀다. 거기에 있는 동안, 그는 북오스트리아의 슈타인바흐 암 아터제(Steinbach am Attersee)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며, 휴가 기간 동안에 작곡에 집중, 그의 《교향곡 1번》과, 유명한 민요 시집에 기초한 가곡 모음집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로부터의 가곡》의 대부분을 완성했다.

 

1897년, 서른 일곱의 말러는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음악적 지위인 비엔나 오페라의 감독직을 제안받았다. 그 자리는 '황실' 지위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법에 따르면 그 자리는 유대인이 맡을 수 없었다. 독실한 유대교인이 전혀 아니었던 말러는, 이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로 종교를 바꾸었다. 비엔나 오페라에서의 그의 십년은 비엔나 오페라의 레파토리와 예술적 기준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그의 치열한 성격과 주목할 만한 완벽주의, 그리고 완고한 의지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프랑스 작곡가 쥘 마스네의 작품이 말러가 오페라단을 맡았을 당시의 스타일에 부합했다면, 그의 지휘 하에서 대중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루트비히 판 베토벤, 그리고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말러는 매 해 아홉 달을 오페라단에서 일했고, 여름에만 작곡할 여유가 있었다. 이 여름을 그는 주로 마이어닉(Maiernigg)에서 보냈고, 그는 뵈르터제(Wörthersee)에 작은 오두막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서 그는 교향곡 4번부터 8번,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에 기초한 《뤼케르트 가곡》과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그리고 그의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가곡의 마지막인 《북 치는 소년》을 작곡했다.

 

1902년에, 말러는 알마 쉰들러(1879년–1964년)와 결혼했고, 사이에 두 딸을 두었는데, 후에 조각가가 된 안나 유스티네 말러 ('Gucki'; 1904–1988) 와 성홍열로 다섯 살에 죽은 마리아 안나 ('Putzi'; 1902–1907) 였다.

 

첫째 딸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그에게 또다른 타격이 찾아왔다. 같은 해에 그는 심장병 (감염성 심장 내막염) 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의 운동을 제한하고 그의 걸음 수를 세도록 처방받았다. 오페라단에서의 예술적 문제에 대한 그의 완고함은 적을 만들어냈고, 또한 언론의 반유대주의적인 공격은 그를 더욱 괴롭혔다. 그의 1907년 오페라단 사임은 전혀 의외의 일이 아니었다.

 

말러 자신의 음악은 생전에는 널리 자주 연주되지는 않았고, 또한 대개 그리 반응이 좋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짧고 고전적 형태를 띤 《교향곡 4번》은 일각에서 어느 정도의 인정을 받았지만, 그의 작품이 큰 대중적 성공을 거둔 적은 거대한 《교향곡 8번》의 1910년 뮌헨 초연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 이후에 쓴 곡들은 그의 생전에 연주되지 않았다.

 

비엔나 오페라를 떠난 이후, 그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로부터의 제안을 받았다. 그는 1908년에 거기에서 한 시즌을 지휘했지만, 대체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선호하여 밀려나게 되었다. 그는 대중과 비평가 모두에게서 굉장히 호평을 받았지만, 메트 위원회 위원들의 선호도에서 밀려났다. 유럽에 돌아와서 결혼 생활에 위기와 알마의 불륜이 드러나고, 말러는 1910년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한 번의 (그리고 분명히 도움이 된) 면담을 가졌다.

 

유서깊은 뉴욕 필하모닉과 지휘 계약에 서명하고 난 후, 말러와 그의 가족은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이 시기에 그는 《대지의 노래》와, 마지막 완성작이 된 《교향곡 9번》을 완성했다. 1911년 2월에 길고 힘든 뉴욕에서의 콘서트 시즌 도중에, 말러는 연쇄상구균 감염으로 크게 앓았고, 발열이 있는 상태에서 그의 마지막 공연 (프로그램에는 그의 《교향곡 4번》과 부조니의 Berceuse élégiaque 초연이 포함되어 있었다) 을 가졌다. 유럽에 돌아와 그는 파리로 옮겨졌고, 거기에서 가장 최근에 개발된 새 혈청을 접종받았다. 하지만 약은 듣지 않았고, 그의 요청에 따라 빈으로 옮겨졌다. 그는 거기에서 감염증으로 1911년 5월 18일, 나이 오십에 그의 《교향곡 10번》을 미완성 상태로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의 유언에 따라, 비엔나 외곽의 그린칭 공동묘지에 그의 딸 옆에 안장되었다.

 

“나는 삼중으로 고향이 없다”고 말러가 말한 적이 있다. “오스트리아 안에서는 보헤미아인으로, 독일인 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세계 안에서는 유태인으로서. 어디에서도 이방인이고 환영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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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 이벤트 (13)

날짜 / 기간 요약 / 상세내용
1878 빈 음악원을 졸업함
1880-11-01 첫 야심작 '탄식의 노래'(Das klagende Lied)를 완성함. 빈 음악원 졸업 직후 착수한 <탄식의 노래>를 이때 완성함. 훗날 "내가 최초로 '말러'가 된 작품"이라 자평함.
1883 올로모우츠(Olomouc) 극장의 지휘자로 임명됨
1885 프라하 신 독일 극장(Neues Deutsches Theater) 부지휘자로 임명됨
1886 라이프치히 신국립극장 지휘자 취임
1889 아버지 베른하르트 별세
1891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극장의 상임지휘자로 취임. 첫 장기 계약
1897-10-08 빈 궁정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됨.
1902-03-09 알마 신들러(Alma Schindler, 1879~1964)와 결혼
1907-07-12 장녀 마리아 안나 별세. (향년 4세)
1907 빈 궁정 오페라극장 음악감독직 사임
1908-01-01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데뷔 공연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미국 뉴욕 데뷔 공연을 개최했다.
1910 정신분석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를 찾아가 상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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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나 작품에 대한 언급 (1)

  • '말러' 이(가) String Quartet No. 1 in D minor, Op. 7 에 관해 이 곡의 진보성에 대해 언급함 (1905) 김문경 <구스타프 말러2 - 황금시대>
    "나는 바그너의 30단짜리 악보도 지휘하지만, 이 곡은 단 네 줄인데도 악보를 통 읽을 수가 없군. 하지만 그는 젊으니 그가 옳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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