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바그너 Richard Wa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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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정보

  • 주요역할 작곡
  • 국가 Germany
  • 성별 남자
  • 출생/결성 1813-05-22 Leipzig, Germany
  • 사망/해체 1883-02-13 Venice, Italy
  • 활동시기 Romantic

바이오그라피

전기

어린 시절

리하르트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에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칼 프리드리히 바그너(Carl Friedrich Wagner)는 경찰서 공무원이었는데, 리하르트의 출생 후 여섯 달 만에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고, 1814년 8월에 그의 어머니는 배우 루드비히 가이어와 재혼했다.[1] 가이어는 사실 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소문이 있는데, 어쨌든 친아버지는 리하르트가 여섯 살 때에 세상을 떠나고, 그는 어머니에 의해 양육되었다. 9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젊은 리하르트 바그너는 극작가가 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고, 음악에 대해서는 처음에 그가 쓰고 상연하고 싶었던 극을 한층 향상시킬 수단으로서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곧 음악을 공부하기로 방향을 돌렸고, 그것을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1831년 입학했다. 초기, 그의 음악에 영향을 준 인물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었다.

 

1833년에 나이 스물의 바그너는 그의 첫 완성된 오페라인 요정을 작곡했다. 이 오페라는 명백히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반 세기 넘게 상연되지 않았으며, 초연은 그의 죽음 직후인 1883년에 뮌헨에서 있었다. 그 동안에 바그너는 마그데부르크와 쾨니히스베르크의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서 약식 계약을 맺었으며, 그 동안에 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자에는 자에 기초한 연애금제를 썼다. 이 두 번째 오페라는 1836년에 마그데부르크에서 상연되었지만,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1836년 11월 24일에 바그너는 "미나"라고 불리는 여배우 크리스티네 빌헬미네 플라너(Christine Wilhelmine "Minna" Planer)와 결혼했다. 그들은 리가로 이사해서 바그너는 거기에서 지역 오페라단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몇 주 후에, 미나는 군인과 야반도주했고, 그 군인은 나중에 단 돈 한 푼도 안 남기고 그녀를 떠나 버렸다. 바그너는 미나를 다시 맞아들였지만, 이 일은 30년 후에 비극적으로 끝날 문제 많은 결혼 생활의 시작이었다. 1839년까지 부부는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빚쟁이들을 피해 리가를 떴다 (빚은 그의 남은 생애 동안 바그너를 따라다녔다). 그들의 도주 행각 동안에, 그들은 영국으로 가는 항로에서 폭풍우를 만났는데 이 경험이 그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영감을 제공했다. 바그너는 파리에서 여러 해를 보냈으며, 거기에서 리하르트는 기사를 쓰고 다른 작곡가의 오페라를 편곡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었다.

 

드레스덴

바그너는 그의 세 번째 오페라 《리엔치》를 1840년에 썼다. 뜻밖에 독일의 작센의 드레스덴 왕립 극장이 이 오페라를 공연하기로 했다. 1842년에 부부는 드레스덴으로 이사했으며, 리엔지는 상당히 성공했다.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다음 여섯 해를 보냈으며, 결국 30세에 작센 왕립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그의 첫 두 중기 오페라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탄호이저》를 쓰고 상연했다.

 

바그너의 드레스덴 체류는 바그너의 좌익 정치의 가담으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국가주의 운동은 독일 내 영방국가들에서 힘을 얻고 있었으며, 자유와 약한 주들의 한 나라로 통일에 대한 열망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이 운동에서 매우 열성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극단 좌익 잡지인 Volksblätter를 편집하던 그의 동료 아우구스트 뢰켈(August Röckel)과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 등을 포함한 손님들을 받아들였다.

 

작센 정부에 대한 널리 퍼진 불만은 1849년 4월에 작센의 왕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 2세가 국회를 해산하고 사람들이 그에게 요구했던 새 헌법을 거부하면서 결국 끓어넘쳤다. 5월 혁명이 발발했고, 바그너는 거기에서 사소한 도움을 주었다. 혁명은 초기에 작센과 프로이센 연합 병력에 의해 재빨리 진압되었고, 혁명 주도자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 바그너는 처음에는 파리로, 또 취리히로 도망해야 했다. 뢰켈(Röckel)과 바쿠닌(Bakunin)은 도망치는 데에 실패했고 오랜 기간의 수감 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망명, 쇼펜하우어, 마틸데 베젠동크

바그너는 다음 열두 해를 망명 생활로 보내야 했다. 그는 드레스덴 봉기 이전에 로엔그린을 완성했고, 이제 그의 친구 프란츠 리스트에게 그가 없는 상태에서 그것이 상영되도록 간절한 편지를 썼다. 리스트는 꼭 필요할 때의 친구라는 것을 증명하듯 결국 1850년 8월에 바이마르에서 초연을 지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그 자신이 극심한 개인적 궁핍에 시달렸고, 독일 음악계에서 고립되었으며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그가 쓰고 있던 음악 단편은 나중에 거대한 작품인 《니벨룽의 반지》로 성장할 것이었는데, 공연될 가망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의 아내 Minna는 그가 《리엔치》 이후에 써 나간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점점 우울증이 깊어져 갔다. 결국 그는 단독(피부병의 일종)의 희생양이 되었고, 작곡을 계속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바그너의 취리히에서의 처음 몇 해 동안 일련의 주목할 만한 수필이 나왔는데, "미래의 예술-작품" (1849)에서 그는 음악, 노래, 춤, 시, 시각 예술, 무대 기술 등이 종합된 개념인 "총체예술(종합예술작품)"(Gesamtkunstwerk)으로서의 오페라의 비전을 설명했다;"음악 속의 유대주의" (1850)은 유대인 작곡가를 반대하여 겨냥한 반유대주의 작품이다; 그리고 "오페라와 드라마" (1851)은 그가 반지 사이클에서 사용하고 있던 미학 개념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계속되는 몇 년 동안, 바그너는 두 개의 독립적인 영감의 원천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것들이 그의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창작으로 그를 이끌었다. 첫 원천은 1854년에 그의 시인 친구였던 게오르그 헤베그(Georg Herwegh(가 그에게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저작을 소개하면서 그를 찾아왔다. 바그너는 나중에 이를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불렀다. 그의 개인 환경은 분명히 그가,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이 비관적인 관점인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쉽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의 운이 더 나아진 후에도 남은 생애 동안 쇼펜하우어의 신봉자로 남았다.

 

쇼펜하우어의 주의는 음악이 예술 가운데에서 최고의 지위를 점하며, 이는 음악이 물질계와 연관되지 않은 유일한 예술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바그너는 이 주장을 환영했으며, 그가 그의 "오페라와 드라마" 에서 이와 직접 상반되는, 오페라의 음악이 드라마의 원인에 따라가야 한다는 주장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강하게 공명을 이루었음에 틀림없다. 바그너 학자들은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바그너로 하여금 그의 반지 사이클의 뒤쪽 절반을 포함하는 후기 오페라에서 음악이 더 강한 명령을 하는 역할을 맡도록 했다는 주장을 해 왔다. 많은 측면의 쇼펜하우어적 주의는 바그너의 이어지는 대본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마이스터징거에 나오는 구두장이 시인 한스 작스는 일반적으로 바그너가 자신을 가장 많이 반영하는 인물로 간주되는데,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적인 창조의 전형이다.

 

바그너의 두 번째 영감의 원천은, 비단 상인 오토 폰 베젠동크의 아내 시인 마틸데 베젠동크였다. 바그너는 베젠동크 부부를 취리히에서 1852년에 처음 만났다. 오토는 바그너 음악의 팬이었는데, 바그너의 뜻에 따라 그의 땅에 작은 집을 세워 주었다. 1857년까지 바그너는 마틸데에게 푹 빠져 버렸다. 마틸데는 그의 애정에 일부 답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녀는 그녀의 결혼을 위험에 빠뜨릴 의도는 없었으며, 그녀의 남편에게 그녀와 바그너의 만남을 계속 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정 행각은 바그너가 링 사이클을 잠시 제쳐놓고 (이후 12년 동안 재개되지 않았다), 기사 트리스탄과 (이미 결혼한) 귀부인 이졸데의 사랑 이야기에 기초한 트리스탄과 이졸데 작업을 시작하게 했다.

 

불편한 애정 행각은 1858년에 Minna가 바그너로부터 마틸데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게 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이어진 대면 후에, 바그너는 혼자서 취리히를 떠나 베니스로 향했다. 그 다음 해에, 그는 다시 파리로 이동해 Metternich의 공주의 노력 덕분에 상연되는 탄호이저의 새 개정판 상연을 보게 되었다. 새 탄호이저의 1861년 초연은 대 실패로 끝났는데, 이는 Jockey Club 소속의 귀족들에 의한 방해 때문이었다. 이후의 공연은 취소되었고, 바그너는 서둘러 도시를 떠났다.

 

1861년에 바그너에 대한 정치적인 추방이 해제되었고, 작곡가는 프로이센의 비브리히에 머무르면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작업을 시작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오페라가 그의 작품 가운데에 가장 밝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코지마는 나중에 "미래 세대가 이 독특한 작품 안에서 상쾌함을 찾는다면, 그들은 눈물 속에서 미소가 떠오르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썼다.) 1862년에 바그너는 결국 Minna와 이혼했지만, 그는 (또는, 적어도 그의 채권자는) 그녀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1866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했다.

 

국왕 루트비히 2세의 후원

바그너의 행운은 1864년에 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2세가 나이 19세로 즉위하자 극적인 계기를 맞았다. 젊은 왕은 어린 시절부터 바그너의 오페라의 열렬한 숭배자였기에 작곡가를 뮌헨으로 데려왔다. 그는 바그너의 상당한 빚을 해결해 주었고, 그의 새 오페라가 상연될 계획을 세웠다. 리허설에서의 각고의 어려움 끝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뮌헨 왕립 극장에서 1865년 6월 10일에 큰 성공을 거두며 초연되었다.

 

그 때 바그너는 또 다른 애정 행각을 벌이게 되는데, 이번에는 바그너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트리스탄 초연의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의 아내인 코지마 폰 뷜로와 함께였다. 코지마는 프란츠 리스트와 유명한 백작 부인인 마리 다구 Marie d'Agoult (필명 다니엘 스턴) 사이의 사생아로, 바그너보다 24살 연하였다. 리스트는 바그너와 친분이 있었지만, 그의 딸이 바그너를 보러 다니는 것을 금했다. 1865년 4월에, 그녀는 바그너의 사생아를 낳았고, 이름을 이졸데라고 지었다. 그들의 부주의한 애정 행각은 뮌헨에 추문으로 떠돌았고, 설상가상으로 바그너는 왕에 대한 영향력을 의심하던 뮌헨의 왕궁 일원 사이에서 선호받지 못하는 인물이 되었다. 1865년 12월에, 루트비히는 결국 작곡가가 뮌헨을 떠나도록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분명히 왕위를 버리고 그의 영웅을 따라 망명할 생각도 했었지만, 바그너가 재빨리 그를 말렸다.

 

루트비히는 바그너를 스위스의 루체른 호 인근의 빌라 Triebschen에 보냈다. 마이스터징거는 Triebschen에서 1867년 완성되었고, 다음 해 6월 21일에 뮌헨에서 초연되었다. 10월에, 코지마는 결국 한스 폰 뷜로를 설득해 그녀와 이혼하게 했다. 리하르트와 코지마는 1870년 8월 25일에 결혼했다. (바그너는 그의 새 장인에게 몇 년간 보러 오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 해 크리스마스에, 바그너는 코지마의 생일 선물로 지크프리트 목가를 선사했다. 코지마와의 결혼은 바그너의 생애 마지막까지 지속되었다. 그들 사이에서 또 한 명의 딸인 에바와 아들인 지크프리트가 태어났다.

 

Triebschen에서 1869년에 바그너는 처음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와 만났고, 곧 굳은 친구가 되었다. 바그너의 사상은 니체에게 주요한 영향을 주었고, 그때 니체의 나이는 서른 한 살이었다. 니체의 첫 책인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 1872)는 바그너에게 헌정되었다. 둘 사이의 관계는 니체가 점점 바그너의 다양한 측면의 생각, 가령 그의 평화주의와 반유대주의와 같은 것에 환상이 깨지면서 결국 멀어졌다. "바그너의 경우" (Der Fall Wagner, 1888)와 "니체 대 바그너" (Nietzsche Contra Wagner, 1889)에서, 그는 바그너를 퇴폐하고 타락한 것으로 비난했고, 심지어 그 자신의 이른 시절의 미숙한 시야에 대해서도 자기 비판했다.

 

바이로이트

바그너는 그의 새 가정에 안착하여, 그의 에너지를 반지 사이클을 완성하는 데로 돌렸다. 루트비히의 주장에 따라 사이클의 첫 두 작품인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의 "특별 시사회"가 뮌헨에서 공연되었지만, 바그너는 완성된 사이클은 특별히 고안된 새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기를 원했다.

 

1871년에, 그는 작은 마을인 바이로이트를 그의 새 오페라 극장의 위치로 결정했다. 바그너 일가는 그 다음 해에 이주하였고,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초석이 놓였다. 공사를 위한 자금 조달을 위해, "바그너 협회"가 각 도시에 결성되었고, 바그너 자신도 독일 전역에 콘서트 여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충분한 자금은 루트비히 왕이 또 다른 거액의 보조금을 1874년에 지원한 후에야 모였다. 그 후년에, 바그너 일가는 바이로이트에 리하르트가 반프리트(독일어로 "미혹과 광기로부터의 평화와 자유")라고 이름붙인 빌라를 그들의 영구적인 집으로 삼아 이주를 마쳤다.

 

축제극장은 결국 1876년 8월에 《반지》 사이클의 초연과 함께 문을 열었고, 그 때부터 계속 바이로이트 축제의 개최지로 남았다.

 

만년

1877년에 바그너는 그의 최후의 오페라인 파르지팔에 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작곡에는 4년이 걸렸으며, 그 동안에 그는 또한 일련의 종교와 예술에 대한 수필을 썼다.

 

바그너는 파르지팔을 1882년 1월에 완성했으며, 두 번째 바이로이트 축제가 이 새 오페라를 위해 열렸다. 바그너는 이 때에 심하게 아팠으며, 점점 심한 협심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8월 29일, 열여섯 번째와 최종의 파르지팔 연주 동안에 그는 비밀리에 3장을 연주하고 있는 피트에 들어가, 지휘자 헤르만 레비로부터 지휘봉을 받아서 작품의 결론부에 이르기까지 공연을 지휘했다.

 

이 축제 이후에, 바그너 가족은 베니스로 요양을 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났다. 1883년 2월 13일, 리하르트 바그너는 심장마비로 베니스 대운하 위의 Palazzo Vendramin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바이로이트로 되돌아와 반프리트의 정원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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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기간 요약 / 상세내용
1825 피아노를 처음 배움.
1829 작곡을 배움. 슈라에게서 작곡을 사사받음.
1830 베토벤 '교향곡 9번'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함.
1831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 바인리에게서 대위법을 사사받음.
1833 합창 지휘자로 활동함. 뷔르츠 부르크에서 합창 지휘자로 활동함.
1836 결혼 여배우 민나 플라너와 결혼
1837 리가 극장의 지휘자로 취임
1840 소설 '베토벤 참배'를 발표함
1841 소설 '파리 객사'를 발표함
1849 스위스로 망명함 드레스덴 혁명에 가담하여 망명함. 취리히로 이사함.
1870 재혼 코지마와 결혼함
1871 바그너 협회 설립 바이로이트에 자신의 극장을 만들기로 결심함. 바그너 협회 설립
1873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완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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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뷔시 이(가) '바그너' 을 보고 "바그너, 그는 새벽으로 오인된 황혼이다." 이덕희 <음악가의 만년과 죽음>
    "바그너, 그는 새벽으로 오인된 황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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