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솔티 Georg Sol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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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솔티는 1912년 10월 21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의 태어났다. 유대인 가문이었던 그의 원래 성은 슈테른(Stern)으로 슈테른 죄르지(Stern György)였다. 솔티의 아버지는 슈테른 모리츠(Stern Móric), 어머니는 로젠바움 테레즈(Rosenbaum Teréz). 그의 친척 중에는 사진작가 라슬로 모호이 너지, ‘고엽(Autumn Leaves)'의 작곡가 조제프 코스마도 있다. 숄티가 예술적인 DNA를 가지고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솔티의 아버지는 높아지는 헝가리 민족주의 속에서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해 유대인 성인 슈테른을 헝가리풍의 솔티로 개정했다(헝가리 이름으로는 숄티 죄르지).

솔티는 6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1924년부터 리스트 음악원에서 버르토크, 코다이, 도흐나니 등 음악가들에게, 피아노, 작곡, 지휘 등을 배운 솔티는 13세 때 연주회에서 접한 에리히 클라이버가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연주에 감동을 받고 지휘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1930년 리스트 음악원을 졸업하면 부다페스트 국립 오페라에서 코레페티토르(오페라 가수 연습을 위한 피아니스트)에 채용되어 첼레스타와 하프시코드 같은 악기를 연주하면서 오페라를 배웠다. 1936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리허설을 위한 피아니스트에 결원이 생기는 바람에 솔티는 코레페티토르로 잘츠부르크를 방문했다. 여기서 토스카니니의 눈에 띈 솔티는 그해와 이듬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토스카니니의 조수를 맡게 된다. 1937년 [마술 피리] 공연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에 맞춰 글로켄슈필을 연주했다.

 

솔티가 포디움에 처음 선 것은 1938년, 부다페스트 오페라에서 예상치 않게 [피가로의 결혼]에서 지휘자로 데뷔를 장식했다. 평론가들은 이날 공연을 상당히 호평했다.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이 지휘한 것은 솔티가 처음이었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헝가리 지도자 호르티 공이 나치에 의해 강제로 사임하고 감금되면서 반 유대주의가 무르익자 위기를 느낀 솔티는 헝가리를 떠나 스위스에 도착했다. 루체른 페스티벌에 참가한 토스카니니로부터 뉴욕에 초청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토스카니니 부인에게 지원받은 돈도 바닥이 나버려 솔티는 그대로 스위스에서 생활하게 됐다. 스위스에서는 피아니스트로 활동한 솔티는 1942년 제네바 국제 콩쿠르 피아노부문에서 우승했다. 심사위원 중에는 빌헬름 박하우스와 프랑크 마르탱이 있었다. 이후 명성이 올라간 솔티는 음악가로서 성공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아버지를 여읜 솔티는 전쟁이 끝나고 뮌헨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발탁됐다. 솔티 본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토스카니니와 에리히 클라이버가 도움을 주었고, 나치 시대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으로 많은 독일인 지휘자들이 포스트를 잃고 있었다는 행운이 따랐기 때문이라 한다. 그가 단 두 차례 지휘했던 베토벤 [피델리오]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 음악감독이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에서 솔티는 나치 시대 금지됐었던 파울 힌데미트의 [화가 마티스]를 독일 초연했다.

 

피아노 실력이 뛰어났던 솔티는 1947년 데카와 피아니스트로 계약을 맺고 녹음 활동을 시작했다. 게오르그 쿨렌캄프를 피아노 반주한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등이 이 당시의 녹음이었다.1949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만나 그의 지도를 받았으며 1951년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참가 모차르트 [이도메네오]를 지휘했다. 1952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오페라의 음악감독에 취임해 1961년까지 재임했다. 여기서 그는 알반 베르크의 [룰루]를 독일 초연했다. 1953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엘렉트라]를 지휘해 미국 데뷔를 기록했고 1954년 여름 라비니아 페스티벌에서는 훗날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처음으로 지휘했다.

 

1958년 데카의 존 컬쇼가 프로듀서를 담당한 빈 필과의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스튜디오 녹음(스튜디오 녹음으로는 최초의 ‘반지’였다)을 지휘한 솔티는 국제적인 명성이 훨씬 높아졌다. 솔티는 바이로이트 음악제 무대에서는 1983년 단 한 차례 등장해 [니벨룽의 반지]를 지휘했다. 1959년 [장미의 기사]를 지휘하며 런던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에 등장했고, 1961년에는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 음악감독으로 취임해 1971년까지 재임했다.

 

1969년 솔티는 드디어 장 마르티농의 뒤를 이어 시카고 심포니의 음악감독에 취임했다. 그동안 침체됐던 시카고 심포니는 솔티의 의욕적인 구조조정과 노력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된다. 1971년에는 영국 국적을 취득하고 나이트(Knight) 칭호를 받았으며, 이후 1972년에는 코벤트 가든의 수준을 높인 공을 인정받아 1972년에는 ‘경(Sir)’ 작위를 받았다. 1991년에는 시카고 심포니 음악 감독직을 사임하고 계관 지휘자가 됐고, 다니엘 바렌보임이 솔티의 뒤를 이어 시카고 심포니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했다. 솔티는 사망할 때까지 시카고 심포니를 중심으로 폭넓은 지휘 활동을 계속했다. 카라얀 생전에는 멀리했던 베를린 필과 잘츠부르크 음악제에도 1990년대에는 등장했다. 그러나 솔티는 카라얀에 대해서 늘 칭찬을 했고, 인터뷰에서도 만년의 카라얀과 관계도 좋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카라얀은 자신의 빈 국립오페라 음악감독 시절 솔티와 빈 필의 [니벨룽의 반지] 녹음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솔티를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린시절과 젊은 시절 전쟁을 경험한 솔티는 1992년 런던 버킹엄 궁전에서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 주최로 열린 솔티 80세 기념 연주회에서 “평화의 사절로서 음악의 힘을 구현하는 ‘평화를 위한 월드 오케스트라(World Orchestra For Peace)’ 구상을 발표했다. 3년 넘는 준비 끝에 1995년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50주년 기념 연주회에서 세계 각지의 오케스트라에 소속된 40여개국 81명의 연주가로 구성된 ‘평화를 위한 월드 오케스트라’ 초연에 성공했다.

 

솔티는 사실상 은퇴한 적이 없었던 것이나 다름 없었다. 1997년 9월 5일 프랑스 앙티브에서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때도 몇 년 동안의 연주와 녹음 스케줄이 꽉 차 있었던 상태였다. 평소 유지에 따라 숄티는 조국 헝가리 땅에 묻혔다. 솔티는 한때 가르침을 받은 적 있었고 경애하던 작곡가 버르토크의 무덤 옆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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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기간 요약 / 상세내용
1938-03-11 지휘자 데뷔 부다페스트 오페라 극장에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으로 지휘자로 데뷔했다.
1942 제네바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
1958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최초의 스튜디오 녹음 존 컬쇼의 프로듀싱으로 바그너의 악극 <니벨룽의 반지> 전곡을 사상 최초로 스튜디오 녹음을 했다.
1969 시카고 교향악단 음악감독 취임 장 마르티농(Jean Martinon)의 뒤를 이어 시카고 교향악단(Chocago Symphony Orchestra)의 음악감독에 취임하여 이후 1991년까지 재직했다.
1972 영국 왕실로부터 'Sir' 작위를 받음. 1971년 영국 국적을 취득하고 그해 기사(Knight)작위를 받은데 이어 이때 '경(卿, Sir)' 작위를 받았다.
1995 '평화를 위한 월드 오케스트라' 첫 연주 유엔 창설 50주년을 맞아 그가 조직한 '평화를 위한 월드 오케스트라'(World Orchestra for Peace)의 첫 공연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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